일터에서 쓰는 글

느리게 살기, 안단테 혹은 라르고

몽당연필62 2008. 7. 31. 12:38

느리게 살기, 안단테 혹은 라르고


사람들은 말한다. 바쁜 게 좋다고, 그게 행복한 것인 줄로 알라고. 물론 일이 없어 바쁘지 못한 사람에게야 바쁜 사람이 부럽고 행복하게 보일 터이다. 그런데 난 이 어질어질한 속도 경쟁을 그만두고 싶다. 천성이 느려 터졌기에, 빠른 사람들에 휩쓸려 나도 덩달아 빨리 움직여야 하고 바빠야 하는 게 싫다.


빠르다. 그리고 급하다. 세상은 오늘도 정신없이 휙휙 돌아간다. 자명종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뜬 순간이 전쟁 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씻는 둥 마는 둥,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전철역을 향해 뛰다시피 걷는다. 전철에서 내려서는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또 성큼성큼 걷는다. 회사에서도 일에 쫓기고 마감 독촉하는 것이 업무다. 설사 내가 늦었더라도 상대에게는 ‘빨리빨리’를 요구한다.

물론 내 바쁜 이유의 태반은 게으름 탓이다. 늦잠 실컷 잤으니 씻을 시간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하고, 업무 시간은 잡담과 쓸데없는 인터넷 검색으로 탕진하니 하루가 짧을 수밖에. 사실 정말 숨 막히게 바쁜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나를 포함한 더 많은 사람들은 바쁜 게 아니면서 바쁜 척하거나 이유 없이 서두르는 병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빠른 것을 좋아하니까.

 

* 2004년 9월 ‘농민신문’에 보도된 경북 상주시 이안면 이안2리의 소를 타고 들일 다니는 농민 김창국 씨의 모습.

 

사람들은 말한다. 바쁜 게 좋다고, 그게 행복한 것인 줄로 알라고. 물론 일이 없어 바쁘지 못한 사람에게야 바쁜 사람이 부럽고 행복하게 보일 터이다. 그런데 난 이 어질어질한 속도 경쟁을 그만두고 싶다. 천성이 느려 터졌기에, 빠른 사람들에 휩쓸려 나도 덩달아 빨리 움직여야 하고 바빠야 하는 게 싫다.


내가 좋아했던 빠르기말, 안단테와 라르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음악시간에 악곡의 빠르기 정도를 표시하는 빠르기말들을 배웠다. 포르테, 모데라토, 안단테 따위 말이다. 나는 ‘안단테’와 ‘라르고’라는 말이 참 좋았다. 무엇보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라는 그 의미가 마음에 들었다. 성적도 처지고 뜀박질도 느리고 남들보다 빨라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던 아둔한 학생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정확히 안단테나 라르고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좋아하는 노래가 애잔한 가곡들이었고 유행가도 조금 느린 듯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나 배호의 ‘안개 낀 장춘단 공원’이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새로 나오는 유행가마다 템포가 점차 빨라지는 것이었다. 윤수일의 ‘아파트’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마침내는 너무 빨라서 도저히 따라 부를 수 없는 랩 음악이 어느새 우리 대중음악을 지배하고 있었다. 노래가 빨라질수록 나는 새 노래 배우는 데 절망했고, 그 반발인지 느린 노래(그러니까 옛날 노래)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신곡’은 알지도 부르지도 못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래는 한 가지 예일 뿐, 사실 요즘의 우리 사회는 모든 면에서 느린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게으름이 아닌, 정당한 여유마저도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우리 조상님들이 누누이 빠르기보다는 정성과 여유를 강조했는데도 말이다.

전해오는 속담들을 한 번 떠올려보라. ‘빨리 데워진 방이 빨리 식는다’고 했고,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으며, ‘아는 길도 돌아서 가라’고 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라는 속담도 있다. 이처럼 속도보다는 정성과 조심성 그리고 일을 추진해가는 과정을 중시하면서, 한편으론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와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쓰랴’와 같은 말들로 허둥대고 조급한 작태를 경계했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님들이시다.

하지만 우리 후손들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성질 급한 민족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할 만큼 속도의 노예가 되어 도무지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여유가 없으니 아량도 없다. 정녕 빠른 것을 효율이고 미덕이며 정답이라 여기는 듯하다.


‘느리게’는 속도 개념 아닌 삶의 질에 대한 자성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으니 ‘차면 반드시 넘친다’는 것이다. ‘빠르게’에 지친 사람들 역시 하나 둘씩 세태를 배반하고는 ‘느리게’로 돌아서고 있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여기서 빠르게와 느리게는 속도의 개념이라기보다, 21세기의 경제적 풍요 속에서도 자아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던지는 삶의 질에 대한 자성의 개념이다. 따라서 느리게 살기를 추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여유를 누리고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느리게 살고자 하는 것을 시대 조류나 문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로 여길 필요도 없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웠거나 동화로 읽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두 동물이 속도를 겨룬다는 것이지만, 담긴 의미는 속도가 아니라 결승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느린 것은 늘 불편한 것이고 당연히 패배할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저마다 무의식 속에 느린 거북이가 마지막 승자임을 이미 각인해 놓고 있다. 나도 거북이가 되고 싶다. 그것도 뭍에서는 느리고 바다에서는 빠른, 여건에 따라 자신의 속도로 살아가는 거북이가 ‘빨리’ 되고 싶다.

한때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혼성 그룹 아바의 노래 ‘안단테 안단테’를 무던히도 자주 들었었다. 이제 한 마리의 거북이가 되어 다시 그 노래를 들으련다. ‘헨델의 라르고’라는 곡명으로 알려진 오페라 ‘세르세’ 중의 ‘그리운 나무 그늘이여’도 들어야겠다. 비록 잠시일지라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과속 폭주하고 있는 삶에 브레이크를 채워놓고.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