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가는 길

상주, 감나무에서 가을이 익는다

몽당연필62 2007. 11. 16. 09:54

 상주, 감나무에서 가을이 익는다

 

경상북도 상주시는 고대국가 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영남지방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 신라 때 전국 9주(州), 고려 때 전국 8목(牧) 중의 하나였고, 조선 때는 경상도 관찰사가 상주목사를 겸했다고 한다. 경상도가 경주(慶州)에서 경을, 상주(尙州)에서 상을 취해 이뤄진 지명인 것만 보더라도 상주의 깊은 뿌리와 높은 위상을 알 수 있다.

 

 경매를 하기 위해 상주원예농협 공판장에 출하된 감. 주차장을 가득 메웠다.

 

상주의 가을은 감나무를 타고 온다. 산이 많은 경북 지역치고는 들이 넓어서 쌀 생산량이 경북에서 첫째요 전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지만, 그보다는 감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주 하면 떠오르는 특산품이 곶감. 상주에는 예부터 삼백(三白)으로 불리는 것이 있는데 곶감·쌀·누에고치가 그것이다. 상주 곶감은 씨가 적고 당도가 뛰어나며 과질이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전국 곶감 생산량의 60% 정도를 상주에서 점유하며, 원재료인 생감이 약 400㏊의 면적에서 연간 4000톤가량 생산된다.


상주의 가을은 감나무를 타고 온다

상주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상주원예농협 공판장이었다. 10월 중·하순이면 생감 출하가 한창인데, 쏟아져 나오는 감 물량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면 말로 듣는 것보다 공판장에 와서 경매하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이 훨씬 생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는 말도 있겠다, 공판장에 도착하여 주차장에 차를 대려니까 들여보내주지를 않는다. 할 수 없이 근처 공터에 차를 세우고 공판장으로 갔는데 과연 명불허전이다. 장내는 말할 것 없고, 800여 평은 됨직한 주차장까지 온통 감 상자에 점령된 채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볏가마나 수박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이처럼 많은 감은 처음 보는지라 마침 그곳에서 만난 상주원예농협 정우승 과장에게 물어보니 상주시 농민들의 생감 출하 금액이 연간 100억 원 가까이 된다고 한다. 경매는 해마다 한로(10월 8일 무렵) 전후에 시작해 11월 초까지 계속 된다.

 

회전축에 감을 끼우고 칼을 대면 껍질이 벗겨진다. 감 한 개 껍질을 벗기는데는 약 2초가 걸린다.

 

이번에는 생감 껍질을 벗겨 곶감으로 말리는 현장을 찾아 나섰다. 상주야 감의 고장인데 어디로 간들 그런 모습 못 보랴 싶어 견훤산성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남장동이라는 마을에 들르니 ‘곶감마을’이라는 표석과 간판이 눈에 띈다. 시내에서 그다지 먼 곳이 아닌데도 밭마다 집집마다 온통 감나무 천지요 나무에는 아이 주먹만한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익어가고 있다.

 

껍질을 벗기고 타래를 지어 시렁에 매달아놓은 감.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집이 있어 담 너머를 기웃거리니 예닐곱 명의 아주머니들이 마침 감 껍질 벗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공판장에서 낙찰받은 생감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기계를 이용해 껍질을 벗기는데, 기계의 회전축에 감을 끼우고 칼을 대면 채 2초도 안돼 깎이는 것이 여간 능숙한 솜씨가 아니다. 껍질을 벗긴 감은 시렁에 매단 끈으로 20여 개씩 꼭지를 묶고 한 줄로 타래를 지어 늘어뜨린다. 머지않아 이 감들이 잘 마르면 다디단 곶감이 되어 전국의 호랑이들을 물리치면서 상주의 이름을 떨칠 것이다.


자전거 보급률 전국 최고…자전거 박물관 건립도

상주는 곶감 말고 자전거의 고장으로서도 명성 높다. 평탄한 지형에 도시가 형성되어 누구나 쉽게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여건 때문인지 상주에는 1910년께부터 자전거가 보급되었다. 1925년 상주에서 ‘조선 8도 전국 자전거 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 자전거의 대명사 엄복동과 상주 출신 박상헌이 출전하여 일본 선수들을 누르고 우승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 위에 상주에서는 1999년부터 해마다 가을에 전국 단위의 자전거 축제가 열리고 있고, 2002년에는 자전거 박물관까지 문을 열였다. 또 시가지를 감싸고 흐르는 북천과 병성천을 따라 자전거 전용 도로를 개설함으로써 시민들이 안심하고 자전거를 즐길 수 있게 했다. 인구가 약 11만 명인 상주시에는 현재 8만 5000여 대의 자전거가 굴러다니고 있으니 이는 열에 여덟은 자전거를 갖고 있다는 계산이어서 전국 최고의 자전거 보급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출퇴근 및 등하교 시간이면 자전거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환경과 교통 문제 해결은 물론 건강을 증진하는 효과까지 얻고 있다.

 

자전거박물관을 둘러보고 있는 어린이들.

 

남장동에 있는 452㎡(137평) 규모의 자전거 박물관은 말 그대로 자전거의 천국이며 자전거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다. 초기 자전거, 이색 자전거, 경기용 자전거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고 저전거의 작동 원리를 비롯한 각종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자전거 애호가와 어린이들이 많이 찾는다.

상주는 감과 쌀 말고도 생산량으로 따져서 배 1만 6000톤(전국 2위), 포도 2만 1000톤(〃 4위), 사과 2만 2000톤(〃 5위), 오이 5400톤(〃 7위), 복숭아 1300톤(〃 8위)이나 되는 농업지대지만, 자전거도 훌륭한 문화 자본으로서 시민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국민 울린 한 송이 꽃, 효자 정재수

어린 시절 ‘나도 그런 어린이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지배하게 했던 두 명의 어린이가 있다. 한 명은 반공 소년 이승복이고, 다른 한 명은 효자 정재수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외치며 죽어간 이승복이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터이지만, ‘효자 정재수’라고 하면 대부분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1964년생인 정재수는 1974년 1월 22일 아버지와 함께 충북 보은군에 있는 큰집으로 설을 쇠러 가던 중 폭설에 쓰러진 아버지를 구하려고 자신의 옷을 덮어주었지만 결국 아버지와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이 일은 당시 전국적으로 큰 뉴스가 되었고, 그의 효행을 널리 알리고자 전국 초등학교에는 효자 정재수의 동상이 세워졌다. 또 ‘갸륵한 꽃 한송이’라는 제목의 글로 도덕과 바른생활 교과서에 수록되었는가 하면, ‘아빠하고 나하고’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눈물샘을 자극했다.

 

효자 정재수 어린이 동상과 기념관.

 

정재수 어린이의 모교인 화서면 사산초등학교는 ‘효자 정재수 기념관’으로 단장되어 지금도 그의 애틋한 효행을 전해준다. 이곳에는 그의 생활기록부와 호적등본 사본, 효행 내용이 실린 교과서, 효와 관련된 각종 자료 및 문헌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그가 공부했던 2학년 1반 교실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는데, 한 책상 위에 놓인 조화가 그곳이 정재수의 자리였음을 알려준다.

 

후백제 건국한 견훤이 옛 상주 땅 사람

상주는 고도답게 역사 유적도 풍부하다. 신라 유리왕 18년(서기 41년)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6가야 중 고령가야 태조의 무덤으로 알려진 왕릉이 함창읍에 있고, 화북면 장암리에는 견훤산성이, 화서면 하송리에는 성산산성이라고도 하는 견훤성이 있다.

 

장각폭포는 수량이 많은 여름철에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견훤산성 가는 길에 화북면 상오리의 장각폭포가 좋다고 하여 잠시 들러 머물렀는데, 속리산에서 시작한 시냇물이 장각동 계곡을 흐르다 6m 높이의 절벽을 타고 떨어지는 자연 폭포다. 폭포 위 기암에 세워진 금란정이라는 정자가 운치를 더하고, 폭포수가 떨어져 형성된 용소의 물은 맑다 못해 검푸르기까지 하다. 다만 가을 가뭄이 제법 길었던 탓에 수량 적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견훤이 축성하였다고 전해지는 견훤산성에 오르니, 분지에 솟은 해발 800m 정도의 우뚝한 봉우리 주위에 석축을 한 성이다. 계곡을 이룬 곳은 높이가 15m 이상이며 자연 암석 위에 쌓은 부분은 4~5m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너비는 4~6m이고 완전한 벽면이 6m인 것으로 미루어 당초에는 6m 내외로 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상주에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 관련 유적이 많다. 견훤산성도 견훤이 세웠다고 전한다.

 

이곳에서는 화북면 소재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충북 보은군과의 경계를 이루는 속리산의 준봉들도 눈앞에 펼쳐진다. 견훤은 이 높은 곳에 성을 쌓고 웅거하면서 북쪽 지방에서 경주로 향하는 공납물을 모두 거둬들였다고 전해온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견훤이 전주를 근거지로 후백제를 창업한 인물인데, 상주의 옛 성들이 그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견훤이 지금은 문경시에 속하지만 옛날에는 상주 땅이었던 가은읍 출신인 까닭으로 보인다. 그는 이곳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의 비장으로 있다가 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웠다.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상주예술촌과 경천대

상주시 북서쪽에 있는 견훤산성을 오르내리느라 시간을 적지 않게 써버리는 바람에 동쪽 사벌면 매호리의 상주예술촌과 삼덕리의 경천대를 살펴보기 위해 길을 서둘러야 했다.

상주예술촌은 문화 창작 공간이 부족한 상주 지역 예술인들에게 창작 의욕을 고취하고, 시민과 학생들에게는 예술 체험 및 작품 제작의 실습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2002년 옛 매호초등학교를 예술촌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한국예총 상주지부가 맡아서 운영하는 이곳에는 사무실과 전시실·작업실·공연장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음악 캠프, 수채화 교실, 통기타 교실 등 예술 체험과 각종 이벤트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역 예술인들에게 창작의욕을 고취하는 상주예술촌.

 

영남의 젖줄 낙동강은 넉넉한 품이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남한에서 가장 큰 강이다. 사람들은 이 강에서 물을 끌어다 농사를 짓고 공장을 가동한다. 그런데 온유하게 흐르는 이 강의 얼굴이 상주에 이르러 사뭇 달라진다. 낙동강 서쪽 면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만나면서 한 폭의 그림을 빚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그림의 중심에 경천대가 있다.

아찔한 절벽 위에 커다란 바위들이 자연적으로 생성되어 이뤄진 경천대는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니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건너편 백사장을 비롯한 중동면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경천대에는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정기룡 장군이 젊은 시절 용마와 더불어 수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그때 장군이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말먹이 통이 남아 있다.

 

경천대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경천대 일대는 관광단지로 개발되어 있다.

 

경천대 바로 옆에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갈 때 따라가 함께 고생했던 우담 채득기 선생이 후일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은거했다는 무우정이라는 정자도 남아 있다. 또 경천대 일대는 숲이 울창한 데다 수영장과 야영장, 놀이시설 등을 갖춘 유원지로 개발되어 상주 시민들의 휴식처로 손색이 없다.

해가 짧아 경천대에서 낙동강 절경 감상을 끝으로 여정을 멈춰야 했으나, 사실 상주의 절반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셈이다. 상주는 행정구역이 6동 1읍 17면인 도농복합도시로서, 면적도 서울의 갑절이 넘는 1255㎢의 큰 고장인 것이다.

아쉬움 속에 상주 땅을 벗어나는데 감나무 너머로 까치밥처럼 빠알간 노을이 내려앉고 있다. 그러고 보니 상주시의 상징 나무가 감나무요, 상징 새가 까치다.  *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