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쓰는 글

글 쓰기, 부탁하기는 쉬워도 부탁받은 사람은 괴롭다(2/2)

몽당연필62 2008. 1. 7. 09:25
* 1/2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부탁이든 강압이든, 윗분의 글을 대필해주는 것이 내키지 않는 일이라고 해서, 내가 허투루 글을 쓸 수 있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일단 글을 써주기로 했다면, 그것이 활자로 되살아날 것이든 소리로 공중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든, 나는 낱말 하나 선택하는 데도 국어사전을 몇 번이나 펼쳤다 덮는다. 문장 한 줄 늘어놓는 데도 몇 번씩 인서트와 딜리트를 거듭하며, 연설문의 경우 호흡할 부분까지 가늠할 정도로 노심초사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작가로서의 자존심이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를 본 적이 있으신지? 제2차 세계대전 때 태국에서 일본군 포로가 된 영국군들은 전쟁 상대방인 일본군에 의해 사용될 콰이강 교량 건설에 동원되었으면서도 그 다리를 심혈을 기울여 튼튼하고 완벽하게 건설한다. 그리고 완성된 다리 난간에 '이 다리는 영국군이 설계하고 건설했다'는 푯말을 붙인다. 그 푯말은 '너희 일본군은 꿈도 꾸지 못할 우수한 다리를 우리 영국군이 만들었다'는 우월감과 자부심과 자존심의 상징이다. 내가 공짜 대필 원고에 공력을 들이는 것 또한 '부탁한 당신은 죽었다 깨나도 쓰지 못할 옥고'라는 점에서 콰이강의 다리와 다르지 않다.

 

원고가 완성돼 건네주면 "고마워. 언제 밥 한 번 살게." 하는 말도 참 무성의하고 건성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부탁한 사람이야 공짜로 글 얻을 생각에 나에게 맡긴 것이고 나도 돈을 기대하며 쓴 것이 아니니, 고맙다거나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면 족하다. 그런데 '언제 밥 한 번 살게'는 그 자리에서 나를 음식점으로 끌고가서 밥을 사먹이지 않는 한 십상팔구 부도 날 공수표요 정말 짜증나는 사족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대필을 하고 얻어먹기로 한 밥만으로도 우리 부서 직원들 회식 몇 번은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래도 밥 사겠다는 말이 공수표로 끝나주면 차라리 고맙고 다행이다. 간혹 정말로 밥을 사겠다고 은전을 베푸는 경우도 없지는 않은데, 어찌 거북한 사람과의 마음에 없는 식사가 흔쾌히 목구멍을 넘어가겠는가. 나는 그런 때는 출장이나 선약을 핑계대고는 구내식당이 있음에도 눈에 띄지 않을 다른 곳에서 라면이라도 사먹고 들어오곤 했으니, 이렇게 따지면 글 써주고 원고료를 받기는커녕 내 돈으로 밥까지 사먹은 셈이 된다.

 

갑자기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사실은 오늘 또 직장의 윗분으로부터 대필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그분이야 가벼운 마음으로, 내 글재주를 기특하게 여겨서, 당신이 개인적으로 써야할 고등학교 동문회보의 발간사를 나에게 맡겼을 것이다. 그분은 원고료나 내가 받을 스트레스 같은 것은 여전히 안중에 없을 것이며, '한 페이지밖에 안 되는 간단한 분량'이니 내가 '한 30분 정도만 수고하면' 만들어낼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나는 오늘 정말 30분 안에 대필의 임무를 마칠 수도 있고, 글이 잘 안 풀리면 밤샘을 해도 모자랄 수도 있다. 완성된 발간사 원고를 받아본 그분은 또 말할 것이다. "아주 좋네. 언제 식사 한 번 하지." 그러나 그분은 꿈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 200자 원고지 5장 분량의 발간사가 결코 자판기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님을, 비록 내 이름으로 인쇄되지는 않지만 당신이 아닌 나의 영혼과 등단 작가의 자존심이 담긴 글임을, 당신이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밥을 사버릴까 나는 두렵다는 것을...

 

직장에서 글재주가 좀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이래저래 정말 피곤하다. 그 재주를 공짜로 얻어 쓰는 사람들은 잠시 생각해볼 일이다. 자신의 '쉬운' 부탁이 글을 써야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님을.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단 몇 줄이면 족할 시가 너무 어려워 소설가가 되었다. 작가에게 길이(분량)는 쉽고 어렵고를 구분하는 기준이 아니다. 일반 사람에게는 남에게 보일 글을 쓰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임을 잘 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기계일 것 같은 작가에게도, 그것이 자신의 작품이든 타인의 대필이든, 쉬운 글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