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 9

슬픈 꽃

씨 뿌리거나 이종할 때 진심으로 풍년 기원하는 것이야 농부의 마음 아니겠나. 그런데 이 일을 어쩐담, 작년에 재미 좀 봤다고 너도나도 심은 양배추가 그만 정말로 대풍이 들고 말았다. 이거 제하고 저거 떼면 남는 것 없을지라 농부는 수확을 포기해 버렸다. 땀방울도 같고 뚝뚝 떨군 눈물도 같은 양배추들이 봄 다 지나도록 주인을 못 만났다. 갈 곳 잃은 양배추 덩이 덩이마다 꽃대를 올려 샛노란 꽃을 매달고 있다. 반갑고 예쁜 꽃이 아니라, 이 집 저 집 풍작이어서 허기진, 여리고 슬픈 꽃이다. /몽당연필/

부모님

사실 부모님 원망 적잖이 했다. 하필 이 깡촌 무지렁이인가, 이웃들 앞다퉈 대처로 떴는데 뭐 있다고 궁벽한 두메를 지키고 사나.... 그러다 어느 순간 철이 들었다. 내가 그냥 큰 게 아니구나, 당신들의 몸과 영혼을 양분 삼아 뼈와 살이 자라고 얼간이를 면했구나.... 자신의 씨앗을 보듬어 싹 틔운 고목을 본다. 심재(心材)는 이미 썩어 거름이다. 어머니도 나를 저렇게 품어 키우셨겠지. 아버지도 스스로를 거름으로 내놓으셨겠지.... /몽당연필/

12월의 눈, 제망매가(祭亡妹歌)

작은형에게 12월의 눈은 설렘도 반가움도 없단다 네 번호가 뜬 전화 반갑게 받았다가 낯선 이가 전하는 울음 섞인 비보에 허둥지둥 너에게 달려가던 그해 12월 인제 가는 길을 더욱 아득하게 한 것이 눈이었고 널 보내는 길을 자꾸만 막아서던 것도 눈이었거든 꽃피는 4월에 와서 차디찬 12월에 간 넷째야 소복이 쌓이는 12월의 눈을 보는 작은형의 소망은 다섯 손가락 중 넷째 손가락을 먼저 잃으신 어머니의 참척(慘慽)이 덧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아! 월명사가 이런 마음이었나 보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같은 나뭇가지(부모)에 나고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몽당연필/

너희가 옳았다

너희가 옳았다 어릴 적 민들레 제비꽃 앞다투던 골목길이 어느 핸가 돌담 밑동까지 아스팔트에 덮여 질경이도 달개비도 앉을 자리를 못 잡았는데, 어떻게 뿌리 내렸는지 분꽃과 까마중은 용케도 골목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이것들을 누가 거름 줘 돌보기는커녕 외려 경운기와 트랙터가 오가며 소란 피우고 이집 저집 자식들 자동차도 험상궂게 달리며 겁이나 줬으련만, 겨울 초입까지 온전해서 꽃 피우고 열매 맺었다. 생각건대 생존 전략이 괜찮다. 타고난 자태가 소박하여 사람들 눈에 띄지도 거슬리지도 않았으니, 우락부락한 돌담 위세를 빌려 수십 마력 괴물 기계들이 몸 사리게 했으니.... 그렇게 분꽃과 까마중의 방식이 옳았다. /몽당연필/

팽나무에게

존귀하거나 비루하거나, 곱거나 추하거나, 혹을 떼었거나 붙였거나, 늙는 건 아름다운 일이야. 한세상 이러구러 살아냈다는 증거잖아. 너를 가만히 보듬고 귀를 기울여 본다. 소곤소곤, 네가 들려주는 세월의 소리가 전해져 와. 빗소리 바람소리 천둥소리, 아이들 까부는 소리, 여인네 치성 드리는 소리, 칼과 창이 부딪고 포탄이 터지는 소리... 아, 너는 그 전설들을 죄다 담고 있구나. 옛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건 아름다운 일이야. /몽당연필/